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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법, 그리고 시장경제

  • Lady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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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교육자유시장정치 이론

[Translated by Jinyoung Bae]

자유와 번영의 역사는 자유로운 기업활동과 법치 존중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은 고전적 자유 정신의 산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로운 기업활동, 법치, 그리고 자유주의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아주 부족하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적 자유의 정치 철학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글 쓰고, 원하는 바대로 믿고 숭배할 수 있으며, 그리고 원하는 바대로 그의 삶을 평화롭게 영위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주장한다. 액턴(Acton) 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유란 모든 사람들이 그가 자신의 의무라고 믿는 바를 행함에 있어서 권위와 관습, 그리고 여론의 영향에 벗어나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유의 보장 이야말로 최고의 정치 목표라고 선언했다.

다른 목표들에 기여하는 최상의 정치목표로서의 자유

Acton 경은 자유란 최상의 목표라고 말하지 않고 그 대신 최상의 정치목표라고 했다. 한 개인 삶을 보다 넓은 개념으로 본다면,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자유는 다른 목표들을 위한 수단이다. 어떤 목표들을 말하는가 - 지상에서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주는 목표들? 자유주의는 하나의 궁극적인 진실만이, 또는 하나의 도덕적 ‘올바름’만이, 또는 ‘선’과 ‘미’에 대한 오직 하나의 정확한 개념만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가장 현명하고 최고의 사람들 조차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신의 전지(全知)전능(全能)전재(全在)함이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세상을 그들 자신의 불완전한 지식의 한계 안에서, 그들이 살아온 좁은 구석의 시야에서, 그리고 절대자에 비해 극단적으로 제한된 정신적 육체적 능력 안에서 보고 이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하느님처럼 인간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심오하고 궁극적인 이런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는 자유를 거부할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그 질문은 너무나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학이나 정치적 통제의 영역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양심과 그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 속에 남겨두어야 한다. 

정치적 통제는 강압의 힘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정치적 통제는 근본적으로 물리적 강압의 힘이다. 그것은 강압 수단의 위협을 통해 시민들에게 어떤 것을 하라 거나 하지 마라는 복종을 요구하는 권리이다. 정치적 힘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읽고 써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명령을 내리는 데 동원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물리적 위해의 두려움을 안겨 주어 그를 다른 사람의 의지에 굴종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위협과 강압의 휘두름에 직면했지만 그들의 신념과 믿음 또는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어떤 사람도 양심에 따랐다는 이유로 고문과 죽음에 직면하지 말아야 함을 주창한다. 정치적 힘이 사람들이 믿는 것과 평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지배하는 데 사용되면, 사회는 다른 신념, 믿음, 사상을 지닌 자들이 정치권력의 지배를 위해 싸우면서 끝없는 투쟁에 놓이게 된다. 선(善), 미(美), 옳음, 그리고 정의에 있어서 누구의 개념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죽고 살기의 대결이 된다. 진리와 도덕에 대해 이런 전쟁이 전개되면, 인간 세상은 인간과 자원 파괴의 지옥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 결과 관용(tolerance)의 정신이 여기에 등장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자 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용 조차 곧 권위주의적인 것처럼 보였다. 관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함축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위를 용납하는 자는 그가 마치 다른 누군가에게 특권을 주고 있는 듯이 그렇게 행동한다. 그 특권이란 언제든지 박탈할 수 있는 그런 특권 말이다. 양심의 자유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권리이며 소수의 편익을 위해 다수에 의해 허용되거나 인정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권력기구인 정부가 그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 양심의 자유와 개인적 자유의 다른 요소들과 같은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는가? 정치 권력자들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위축시키는 것을 어떻게 차단시킬 수 있었는가? 모든 법은 법의 근원적 취지와는 상관 없이 사람이 만든 것이다. 법을 설계하고 승인하며 그것을 성문화 하고 그것의 준수와 집행을 위한 절차와 장치를 구축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법과 법적 절차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법치(法治)와 정치적 책임

사회가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 아래에 놓이도록 하게 하는 길은 법을 시행하고 집행하는 사람들도 시민들과의 관계에서 명료하게 정의된 절차 아래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 법철학자인 다이시(Albert Venn Dicey)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와 함께 수상에서 밑으로는 순경이나 세금징수원에 이르기 까지 모든 공무원은 법적 정당성이 없는 모든 행동에 대해 다른 모든 시민들과 동일한 책임하에 놓인다.”

법치의 핵심 요소는 정부가 시민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와 정부의 법적 대리 기관은 한 개인을 재판관에게 고발하지 않고서 그를 일정 기간 구금할 수 없다. 인신보호영장(writ of habeas corpus) 제도는 어떤 사람도 법정에서 고발당하지 않고서는 물리적 체포나 무한정 구금을 당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법 위반이 일어났음이 그리고 피고인의 구금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있음이 재판정에서 밝혀지지 않으면, 그는 풀려나야 한다. 또는 다이시가 설명했듯이 “법은 개인의 합법적인 자유에 대한 모든 종류의 간섭에 벌 주지 않으면, 그리고 법적 정당성 없이 억류되어 있는 모두는 풀려날 수 있음을 적절히 보장하지 않으면,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법치의 명백한 가치와 이점은 법이 정치적 지배와 법적 질서를 다루는 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모든 자의적인 힘을, 완전히 제거해주지는 못할지라도, 가능한 한 많이 줄여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법의 규칙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법의 규칙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의 법을 말한다. 

자유 그리고 목표-독립적인 규칙들

하이에크의 이 말은 조금은 모호하기 때문에, 그것을 목표-독립적인 규칙이라고 표현하면 보다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이를 도로의 규칙을 통해 생각해보자. 도로 규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 것 규정하고 있다: 차량이 도로의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운행해야 하는지를; 모든 차량은 신호등이 적색일 때 멈춰서 기다려야 하고 신호등이 녹색일 때 주행할 수 있음을; 규정 속도를 준수해야 함을; 경찰차나 구급차가 도로에 나타나면, 모든 다른 차량 운전자들은 그 차량이 지나갈 때가지 비켜주거나 멈추어야 함을.

이 도로 규칙은 모든 차량 운전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특정인에게 특혜나 부담을 주지 않는다.이 점에서 그것은 일반적이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더욱이 모든 운전자가 이 규칙을 따르는 한, 운전자는 그가 원할 때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가에 상관 없이 자유롭게 도로 운행을 할 수 있다. 일반적이고 균일하게 적용되는 이 도로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어떤 운전자도 도로나 고속도로에서 교통위반 단속 중인 경관에 의해 끌려가지 않는다.

시민들이 규칙을 준수하는 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칙은 그들의 행위나 그들의 상호교류로부터 어떤 특정의 결과나 산출물을 함축하거나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목표-독립적’이라 할 수 있다. 도로 규칙 준수가 사람들이 일하러 가기 위한 것인지, 또는 주치 치과의사를 방문하기 위한 것인지, 또는 잠시 집 밖으로 나가 단지 운전하기 위한 것인지,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법치 하에 있는 자유로운 사회의 기본적 성격은 사회 그 자체는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는, 또는 ‘자명한 숙명’이거나 소명 받은 ‘역사적 역할’이라는 점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시민 각자의 특정 계획이나 목적과는 달리 어떤 계획이나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개인의 자기-이해(self-interest) vs. ‘대의(大義; great causes)’

자유로운 사회는 개인과는 달리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국가는 ‘위대함’ 으로의 ‘부름’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시민 각자의 계획이나 목적을 대의나 위대한 인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편협함과 이기심으로 보았다. 20세기 전반 국가는 위대한 사람들 아래 위대한 대의를 추구하기를 원해야 한다고 큰 소리를 낸 한 사람이 좀바르트(Werner Sombart)였다. 그는 1930년대 후반 히틀러 국가 사회주의의 거침없는 대변자가 된 독일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세계 1차 대전 기간에, 좀바르트는 상인과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애국적 모색’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책 한 권을 발간했다. 그는 상인은 시장 거래를 통해 얻어지는 그 자신의 이익 외에는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상인을 용기, 복종, 그리고 자기 희생의 덕목을 지닌 영웅적인 정신과 대조적으로 비교했다. 좀바르트가 말하기를, “상인은 단지 권리만을 요구하지만, 영웅은 그의 의무만을 말할 뿐이다.”

물론 ‘영웅’ 특성의 묘사에 있어서 좀바르트가 답하지 않고 남겨놓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누구에게 복종하며 무엇을 위해 희생하는가? 좀바르트의 생각은 시민들이 희생해야 할 목표를 정하고 국가적 과제의 성취를 위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지도자를 통한 국가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그 사회의 개인은 자신의 목표, 목적, 계획, 그리고 꿈을 희생해야 한다. 개인의 이것들은 사소하고, 세속적이며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위대한 정치지도자들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더 높은 계획과 목적에 순응하게 한다. 이 계획과 목적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지만 지도자의 직관적인 통찰력과 깨달음을 통해서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구성원들은 그들 자신의 계획이나 목적을 희생하고서 부과된 위계적인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지도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좀바르트의 ‘영웅’ 사회에서, 시민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은 목적-의존적이다. 즉, 사람들이 지켜야 할 법적 규칙과 규율은 특정 결과를 가져오도록 그들이 행동하고 상호 교류하도록 이끈다. 시민들의 행위가 정치 지도자가 그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구상이 실현되게 하는 길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위대함을 향한 국가 부름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움직이도록 하는 것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개인의 행위, 선택, 그리고 의사결정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각자는 다른 사람 목표의 도구로 이용된다. 각자는 그 자신의 목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한 목표에 봉사한다.

이것이 더 높은 목적과 사회의 부름을 부과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자유로운 기업활동과 시장경제에 의심의 눈총을 보내고 종종 적극적으로 적개심을 품는 이유임이 분명하다.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의 핵심은, 그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또는 간여-복지 국가라 불리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고 필요하다면 힘으로 순응하게 하는 정치적으로 설계된 계획을 사회에 부과하고자 하는 욕망과 의도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첫 번째 책인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 사회 설계자를 ‘체제인(體制人, man of system)’이라 말하고 있다. 체제인은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체스 판으로 바라보는데, 그는 전체 체스 판이 자기가 좋아하는 패턴이 만들어질 때까지 인간이라는 체스 조각들을 이리저리 옮긴다. 체제인은 사회라는 체스 판 위의 이 인간 조각들 하나하나가 그 자신의 의지, 욕망, 꿈, 목표, 가치, 그리고 믿음을 가지는 것을 철저히 무시한다. 이것들은 사회 설계자가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지시하고 명령하려는 어떤 시도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다. 

사적 재산, 개인적 자유, 그리고 시민 사회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인적 자유와 사적 재산권은 분리될 수 없는 연결임을 항상 강조해 왔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정의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 사람이 정직하고 평화롭게 자신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것, 또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자발적인 교환 행위를 통해 획득한 것은 그의 것으로 정당하게 간주되어야 한다. 사적 재산의 경우는 공리적 효율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사람들은 그들의 수고로움의 대가가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은 자신의 근면함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적용하려는 동기와 유인을 가진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사적 재산 제도를 방어해 왔다. 왜냐하면 사적 재산 제도는 개인에게 정치권력의 잠재적인 남용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적 재산은 개인이 정치 폭력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공간 또는 영역을 그에게 제공한다. 생산수단 일부의 –그것이 비록 그 자신의 노동뿐이라도- 사적 소유자로서 그는 그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그가 가장 매력적이고 이익이 남는다고 생각하는 일자리를 직접 찾아 나설 수 있다.

개인이 다양한 재산을 소유하고서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하는 공동체는 정부의 명령이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생산, 교역, 그리고 사람들 간 연합의 잠재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사적 재산은 개인 자유의 이상을 실현시켜준다.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사적인 연합 네트워크는 ‘시민 사회’라 불리어 왔던 요소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국가의 권력과 혼자 고립된 개인 사이에 있는 ‘중간적 제도’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 경제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신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고 도움을 준다. 이것은 또한 그것이 없다면 정부 권력에 스스로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외로운 개인에게 힘과 보호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정부의 권력과 간섭 범위가 개인의 영역으로 더 많이 들어올수록 국가는 시민사회의 이런 자발적인 연합 제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침해하고 국가의 관료적인 기구들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시민사회의 중간적 제도의 약화와 제거는 개인으로 하여금 정부 기구를 운영하는 자들의 정치적 변덕과 시혜에 점차 의존적으로 만든다. 개인은 아담 스미스가 우리에게 경고한 체제인들의 손아귀 속의 인질이 된다.

법치가 시행되고 존중 받는 곳에서, 인간의 창의적인 에너지가 펼쳐지게 된다. 각자는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할 자유를 갖고 있다. 자유-시장 경제의 본질은 개인이 그 사회의 다른 사람들의 목적에 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소유와 통제 하에 있는 그 자신의 노동과 특정 자원만을 갖고는 보다 기초적인 몇몇 목표를 넘어서는 자신의 모든 목표를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환 관계를 갖게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에 비해 비교우위가 있다는 것들에 특화 하여 성장하는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과의 교환 기회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노동 분업이 만들어내는 상호 의존은 사회구성원 각자가 그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의 동료들에 봉사해야 함을 점차 의식하게 한다.

개인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 판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신들 주변에 있는 자들과 상호 개선의 기회를 발견하고 이들과 연결, 관계, 그리고 연합을 형성한다. 패턴들이 어떤 모양을 취하고, 인간 상호 연결의 윤곽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런 패턴들은 계획되거나 설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그들 간의 관계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것의 제도적 질서와 구조의 상당 부분은 그것을 만들겠다는 어떤 뚜렷한 의도 없이 그들의 시장과 사회적 교류의 결과에서 확립된 것이다.. 

자유로운 자생적 질서는 사회 설계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하이에크가 18세기 정치경제학자들의 통찰력을 빌려 지적했듯이, 사회질서의 전개는 많은 부분 “인간 행위의 결과이지 인간 설계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하이에크가 강조했듯이, 이 경우가 모두에게 더 이롭다. 왜 그럴까? 새롭게 등장한 사회 패턴, 질서, 그리고 제도는 수많은 사람들 간의 교류에서 그들의 지식, 능력, 창의들이 어우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한 개인이나 어떤 한 집단의 개인들이 아무리 지혜롭거나 선한 마음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나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흩어져 있는 지식과 창의력으로 존재하는 모든 낱개의 지식, 통찰력, 그리고 능력을 알고, 이해하며 평가할 수 없다. 개별 한 사람이 알고 있고 할 수 있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게 하고 그것들을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려면, 각자가 알고 있고 하고 싶어하는 것을 그 자신의 계획에 따라 행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사회 설계자가 자유로운 사회를 보면서 그를 따분하게 하는 것은 세상이 계획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즉 무질서의 뒤범벅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보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계획들로 된 세상이다. 그 계획은 개별 개인이 그 자신의 삶에 맞추어 주어진 계획이다. 이 세상에는 질서가 있고 패턴이 있으며 구조가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개인들 각자가 그들의 자발적인 시장과 사회 관계를 통해 그들 스스로 형성한 상호 교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법의 규칙은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사회활동의 규칙을 제공한다. 자유로운 사회의 규칙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며,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기만하거나 속이지 말라. 이런 형태의 간단한 규칙들 아래 각자는 모든 일의 실천을 자유롭게 그의 양심과 이해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으려면, 그리고 한 때 기업활동 자유의 수호자였던 법 규칙을 완전하고 일관되게 적용하려면, 우리는 모든 시민들에게 자유가, 법 규칙이, 그리고 개인의 책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도록 깨우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자가 자유와 그것의 적에 관해 잘 알 수 있도록 스스로의 깨우침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리고 용기를 갖고 자유, 책임감, 그리고 이 모두가 함축하는 바를 일관되게 지켜나가야 한다.

자유를 걱정하는 어느 누구도 양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자유 주창자들 중의 한 분인 오스트리안 경제학자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말했듯이, “각자는 자신의 어깨에 사회 한 부분의 짐을 지고 있다. 어떤 누구도 그의 책임의 몫을 다른 사람에 의해 경감 받지 못한다. 사회가 파멸로 휩쓸려 갈 때, 어떤 누구도 혼자서는 안전한 길을 찾을 수 없다. … 사회주의와 전제정치로 향하는 경향을 멈추는데 필요한 것은 상식과 도덕적 용기이다.”


Jinyoung Bae is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Mises.kr

 

Richard M. Ebeling is the BB&T Distinguished Professor of Ethics and Free Enterprise Leadership at The Citadel.

Note: The views expressed on Mises.org are not necessarily those of the Mises Institute.
Image source:
flickr/adamqui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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