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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글리츠, 미안한데 조작되는 것은 사회주의지 - 자본주의가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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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자본⦁이자 이론기타 학파

[Translated by Jinyoung Bae (배진영 역)]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후 지금까지 국가의 팽창을 옹호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9/11 사태 이후 그는 항공기 승객의 안전을 위해 연방기구 설립을 요구했다. 그는 그 연방기구를 통해 안전에 관한 “신호”를 보내줄 수 있을 것으로 주장했다. (스티글리츠는 자유 시장은 “비효율적”이며 비대칭 정보 때문에 언제나 덜 균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수상했다. 스티글리츠와 같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정부만이 생산과 교환을 일관되게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결과로 이끌 수 있다.)

십여 년 전 스티글리츠는 베네수엘라의 고(故) 우고 차베스(Hugo Chavez)의 사회주의 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석유자원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카라카스(Caracas)의 빈민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의료와 교육을 접할 수 있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베네수엘라 민간 석유회사의 자본구조를 몰수하려는 차베스의 정책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그 나라 부(富)의 보다 “균등한(equal)” 분배로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어디에서나 바람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재미있게도,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실험이 초-인플레이션과 서방 국가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금융경제 위기들 중 최악의 하나로 망가진 후, 소위 베네수엘라의 경제기적이 왜 망가졌는지를 적어도 설명해야 할 때,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더 이상 베네수엘라 사회주의를 극찬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직 국가 권력의 팽창만이 미국 경제가 저절로 붕괴되는 것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그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Scientific American 최신호1에서 그는 “미국경제는 조작되어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 제목 아래 “그리고 우리는 이에 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만(Paul Krugman), 그리고 “시장은 내적으로 파괴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대중적 선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스티글리츠의 기사 내용은 전혀 놀랍지 않다. 스티글리츠는 과학적 담론에, 즉 많은 수학 방정식들을 동원하여 자유 시장은 나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2에, 열중한다는 점에서 그의 Scientific American에서의 주장은 순수하다.

스티글리츠의 관점으로 보면, 시장은 정보를 전달하고 가공하는 데 있어서 실패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정부는 이 실패를 교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의 노벨 강연에서, 스티글리츠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거나 “작동되지 않게 되었다(palsied)”고 강조하면서, 아담 스미스의 자유-경제 이론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년에 걸친 주요 정치 쟁점은 주로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시장과 정부 간의 적절한 관계”에 집중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의 접근은 정부 편에 섰다.

이어서 그는 그의 노벨 강연에서 “시장이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완전한 경쟁이 요구 된다”고 (이탤릭체는 그가 직접 한 것임) 했다. 그의 주장은 오스트리안 경제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야기한다: 정부는 경제적 교환이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어떻게든지 갖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그러나 스티글리츠는 이 문제에 다가가고자한 적이 결코 없다. 그는 그저 정보에 관한 정부의 우월함을 가정하고 있을 뿐이며 이 가정 아래 그의 논의를 전개할 뿐이다.

스티글리츠의 가장 최근의 논문에서 그는 시장은 시스템적으로 불평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시간이 경과하면서 특권 계층의 소수 사람들만이 자본주의 체제의 이득을 얻는 반면 그 외의 대부분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허덕이게 된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의 기념비적인 2013년 논문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에서 피케티는 자본주의자들을 겨냥했다. 자본수익은 안정적이고 (경제성장률에 비해) 높기 때문에, 그는 한 나라 자본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주 많이 저축함으로써, 그들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증가해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해 많은 점에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 부자들의 저축률은 다른 나라들의 부자들에 비해 매우 낮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불평등 증가는 낮아야만 한다. 적어도 더 높지는 말아야 한다.

이와는 다른 이론이 사실과 훨씬 더 부합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경제 게임의 규칙이 국내외적으로 모두 부자에게 유리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규정되어 왔다. 미국의 규칙들은 이미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규칙들은 다른 선진국들의 그것보다 이런 비뚤어진 방향으로 더욱 나아갔다. 이런 관점에서, 불평등의 증가는 선택의 문제로서 우리의 정책과 법률 그리고 규제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다른 선진국들보다 처음부터 강력했던 미국 대기업의 시장권력이 그 어떤 곳보다 훨씬 더 크게 증대해 왔다. 반대로 대부분의 다른 선진국들보다 약하게 출발한 (역주: 미국) 노동자들의 시장권력은 그 어떤 곳보다 더욱 더 추락했다. 이것은 서비스 부문 경제로의 이동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은 게임의 조작된 규칙들 때문이다. 즉 그것은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역주: 자기 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책하는 것), 투표자 억압, 돈의 영향을 통해 스스로 조작되는 정치 시스템에 내재해 있는 규칙들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악순환이 형성되었다: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을 낳고, 정치적 불평등이 부자에게 유리한 규칙들로 이어지게 하며, 그것이 다시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한다.

이 모든 것이 하방 소용돌이를 낳는 소위 “피드백 고리(feedback loop)”라 부르는 것의 결과로 이어지게 한다. (역주: 이를 위해서는) 소득 불평등의 증대가 마르크스의 “실업자 예비군(reserve army of the unemployed),” 즉 생존에 필요한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예비군, 상태에 이를 때까지 커질 것으로 가정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중산층을 파멸시킨다고 주장했던 그 많은 사람들처럼, 스티글리츠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 후반의 기간을 소위 번영의 황금시기로 간주하면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후 부흥을 위해 실시되었던 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30년대 뉴딜(New Deal) 이후, 미국의 불평등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불평등은 또 다른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시몬 크즈네츠(Simon Kuznets)의 크즈네츠 법칙(Kuznets’s law)이 성립될 정도로 줄어들었다. 크즈네츠는 경제발전 초기 한 나라의 몇몇 부문이 새로운 기회를 차지함에 따라 불평등은 증가하지만, 발전 후에는 그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이론은 오래 동안 데이터에 부합한다. 그러나 1980년대 초쯤 그 추세는 갑자기 뒤집혀졌다.

불평등 증가 –그리고 빈곤 증가- 추세를 바꾸기 위해서 스티글리츠는 뉴딜 당시 미국의 생산, 금융, 수송을 지배했던 뉴딜 규제들에 의해 구축된 금융⦁상업 카르텔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높은 한계세액과 규제구조(regulatory structure)의 도입이라는 경기침체 시기의 정책들로 돌아가기를 주문하고 있다. 사실 현대 법 환경의 일부가 된 반(反)차별 법을 별개로 하더라도 스티글리츠는 우리 미래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 보다 누진적인 세금, 연방재정지원을 통해 모두에게 저렴한 대학교 이수를 포함한 고품질의 대중교육, 이에 요구되는 결코 (역주: 개인의) 파멸을 초래하지 않는 대출이 있어야 한다. 21세기의 시장권력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를 다룰 현대적인 경쟁법과 우리가 갖고 있는 법들의 보다 강력한 집행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결집시킬 수 있는 노동법이 필요하다. 최고 경영자들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급여를 억제하는 기업 지배 구조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은행들이 그들의 표증(表證)이 되어버린 착취 관행에 관여하는 것을 방지할 더 강력한 금융 규제가 필요하다. 여성과 소수자들의 보수가 상대 백인 남성 보수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에, 더 나은 차별 금지법의 집행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보다 양식 있는 상속법을 도입하여, 유리함과 불리함이 세대 간에 이어지는 것을 줄여야 할 것이다.

스티글리츠 논리에 대한 도전

스티글리츠만이 미국경제가 1939년의 그것과 유사하도록 개조되기를 원하는 유일한 현대 경제학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폴 크루그만(Paul Krugman)은 여러 번 “새로운 뉴딜”을 요구했으며 그는 프랜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그의 정책으로 중산층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미국의 중산층은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실제로 주장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우리는 필요하다(we need)”라는 호언(豪言)을 접할 때, 그는 경제를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본은 수확체증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수확체증의 특성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본은 자본소유자의 소득을 증가시키지만 그 외의 모든 이들을 가난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사실 그의 전체 글을 읽게 되면, 사람들은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릴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처럼 시장 시스템은 내적으로 불안정하며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득감소를 겪는 대중의 희생으로 소득 증대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에 시장 시스템은 언제나 내부적으로 붕괴할 것이다.

사실, 스티글리츠의 논리적 결론을 따라가 보면, 미국 노동자들은 더 오랜 시간 노동하고 그들의 생활수준은 점점 낮아짐에 따라 미국 경제는 그들에게 착취와 비참함의 덫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남북 전쟁 때, 남부 지역 노예의 시장 가치는 공장 및 장비인 실물 자본재와 토지의 가치를 포함한 그 지역 전체 부(富)의 거의 절반이었다. 이 지역의 적어도 이 부분의 부는 산업, 혁신과 상업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고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 오늘날 이러한 공개적인 착취는 1980년대의 레이건-대처(Reagan-Thatcher) 혁명 이후 강화되어 온 보다 은밀한 형태로 대체되었다. 이 착취는 ... 주로 미국에서 가속화되는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다.

크루그만처럼, 스티글리츠는 여러 통계와 그래프를 사용하여,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권력을 잡기 전에 미국과 영국의 경제는 “평등”과 번영을 구가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이유로 자유 시장 사상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 그것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미국 중산층을 일구어내었던 잘 다듬어진 후기-뉴딜 경제를 엎어버리고 이들을 빈곤에 시달리는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스티글리츠 분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틀렸다. 첫째, 1970년대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인플레이션과 경기하강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경제가 (10%를 훌쩍 뛰어넘는) 인플레이션 호황(boom)과 1974~75년 사이의 경기침체를 포함해 파괴적인 경기파열(bust) 사이에 휘청거렸다. 영국의 상황은 1977년 “60분(60 Minutes)” 방송3, “영국이 언제나 존재할까?”에서 보여주었듯이 더욱 나빴다.

스티글리츠가 1980년대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좋았다고 주장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슬프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가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이 오늘보다 40년 전에 더 좋았다고 믿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립 브로이어(Philip Brewer)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쉽게 소득평등이 더 높은 생활수준이라고 혼동한다. 1950년대의 소위 황금시대는 미국인의 1/3이 빈곤하게 살았던 시기였다. 브로이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노동자는 단지 한 사람의 소득만으로 한 가족을 중산층 생활수준으로 부양할 수 있었다. 풀타임(full-time)으로 일하는 한 사람이, 심지어 최저임금에서도, 4명의 가족을 중산층 생활수준으로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삶을 “빈곤 속의 삶”이라 부른다.”

이론적으로, 스티글리츠는 자본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수확체증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본과 자원 소유자들의 소득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증가한다고, 그러나 그 증가는 오직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은 범죄자이며 경제가 자본량을 가속적으로 증가시킴에 따라 소득불평등은 –그리고 빈곤은- 논리적으로 뒤따라오게 된다. 이 과정을 뒤집는 유일한 방법은 국가가 자본과 자원의 소유자들로부터 엄청난 소득을 몰수하여 그것을 복지 지출이나 정부 서비스의 제공을 통해 이전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스티글리츠 말이 옳다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이윤-손실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낸 자본축적이 경제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스티글리츠는 재화와 용역의 공급을 증대시키는 자본의 경제적 역할을 잊어버린 것 같다. 자본 소유자들이 거두어들이는 소득만을 보고서 그리고 자본축적의 실질적인 경제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스티글리츠는 균형 잃은 마르크스 분석의 적용에만 그치고 있다. 마르크스 분석에 따르면, “부자”의 소득 지분(持分)은 증가하기 때문에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소득 지분은 줄어든다. 그 결과 팔릴 수 없는 재화의 전반적인 “재고 과잉”은 해고자의 양산, 실업 그리고 궁극적으로 경제 붕괴로 이어지게 한다. 장 바티스트 세이(Jean Baptiste Say)에서 루드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에 이르는 경제학자들은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역사의 기록은- 스티글리츠의 주장이 그로 하여금 그것들을 반복하지 못하게 하는 데 실패한다고 질책했다.

그의 글이 Scientific American에서 출판되고 그의 분석을 과학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스티글리츠는 우리가 그의 관점이 체계적이고 그가 마치 중력의 법칙을 묘사하는 것처럼 반드시 그러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고 믿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상은 스티글리츠가 토마스 맬더스(Thomas Malthus), 칼 마르크스(Karl Marx), 그리고 존 메이날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오류를 반복할 뿐이며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에 관해 경직되고 기계적이며 완전히 엉터리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로부터 우리는 사회주의가 경제를 얼마나 퇴보시키는지를 보아 왔다. 그것이 구(舊)소련, 모택동 시대의 중국, 쿠바, 그리고 지금의 베네수엘라 어디에서 실행되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스티글리츠는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기적”이 어떻게 산산조각 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의 악화가 왜 소수의 사람들만 잘 살게 하고 대중을 빈곤에 빠뜨리게 하는 지에 관한 진실에 지적으로 관여할 능력이 없으며 관여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는 사회주의 경제가 왜 조작되는 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1)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the-american-economy-is-rigged/?fbclid=IwAR3yWocghkh_7-4ePok4df9Yy4NG_w8AxsPnKBQQRFCrqsY_Yma8fHu-Ibw

2) https://www.city-journal.org/joseph-stiglitz-venezuela-16181.html

3) https://www.youtube.com/watch?v=bw53Fbgq4GQ


글쓴이) William L. Anderson

윌리암 앤더슨은 Maryland의 Frostburg에 있는 Frostburg State University의 경제학 교수이다.


Jinyoung Bae is a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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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L. Anderson is a professor of economics at Frostburg State University in Frostburg, Mar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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