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제학자들이 아직도 주관적 가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아직도 주관적 가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03/14/2019Per Bylund

[Translated by Haeng-Bum Kim (김행범)]

주관적 가치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한 얘기로 보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게 분별되지 못하고 있고 학자 및 실무자들에게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주관적 가치를 단지 가격에 대한 어떤 개인의 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실은 그게 아니다. 주관적 가치란 화폐로 표현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주관적 가치는 시장에서의 구매력이라는 객관적 표준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가치가 주관적인 것이라면, 그 구매력 또한 그것이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를 통해) 어떤 주관적 가치를 줄 수 있는가에 따라 평가된다. 또, 시장 형태를 띤 모든 상황 속에서는, 어떤 재화에 대한 구매력을 포기한다는 의사는 그 구매력(그게 그/그녀에게 어떻게 평가되든 간에)이 그것으로 구입될 수 있는 재화에서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가치보다 더 낮은 것으로 그가 주관적으로 평가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화폐로 표현되어 있고 나아가 재화와 서비스를 주관하는 ‘지불의사’는 단지 구매자가 그 거래를 통해 자신의 후생이 증가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가치 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라지는 것의 가치와 그것으로 얻게 되는 가치 사이에는, 그것들이 달리 평가된다는 점(전자가 후자보다 높게 평가된다)을 제외하고는 어떤 관련성도 없을지 모른다. 

학자들이라면 이 점들을 혼동하지 않을 정도의 지각이 있어야 하지만 분명 그들은 아주 혼란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에, 고객의 가치평가에 관한 화폐량을 구하는데 사용될 실제적인 간편 척도를 채택한다. 어느 재화에 대한 고객의 지불의사가 그 재화에 대해 얼마의 화폐가격이 잠재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치가 될 경우에는 이것은 실무자에게는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며 바로 이 때문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모형들은 기업가들이 고객의 ‘선언된’(stated) 지불 의사(그 선언이 신빙성이 있다면)보다 낮은 가격을 책정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적인 지불의사는 고객이 그것을 소유/구입할 경우 왜 고객에게 가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거와 함께 재화를 실제적으로 제시하는 가에도 의존한다. 

장소와 시간 또 메시지가 다를 경우, 이러한 ‘의사’는 그 재화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평가되는가? 뿐 아니라 고객에게 주어진 다른 기회들이 있는가? 에도 좌우된다. 나는 햄버거가 가치 있다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핫도그에 더 많이 가치를 부여할지 모른다. 

그 결과, 핫도그가 존재할 경우 햄버거에 대한 나의 지불의사의 크기는 실질적으로 영(zero)이다; 만약 핫도그가 눈앞에 없다면 햄버거에 대한 나의 지불의사는 아주 클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이해되는가?  

한 개인의 지불의사는 재화에 대한 (주관적) 평가(즉, 직접 경험해 본 만족이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예측이 된 만족)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용 가능한 다른 대안들에도 의존하는 것이다.

주의력이 깊은 실무자들이라면 지불의사의 추정(역주: 예컨대, ‘미세먼지를 50% 줄이기 위해 얼마만큼 더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라는 설문지를 통해 얻는 수치를 곧 청정대기라는 재화에 대한 지불의사의 크기로 추정하는 것)으로부터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매우 둔탁한 도구인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대안적’ 재화들에 대한 주관적 가치 평가(비교/대체)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주관적 가치평가와 객관적 화폐가격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학문적으로 매우 심각한 오류로 간주되어야 한다. 사물에 대해 면밀히 생각하는 직업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물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버리는 것이 허용될 여지는 없다. 

혹은, 이 경우에서처럼, 주관적 가치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실수(실제로는, ‘해석’)를 하는 것도.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당신을 학문세계에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판정 내려야 한다.


Per Bylund

 

퍼 바이런드 박사는 미주리 대학에서 응용경제학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의 기업가정신 학부 Entrepreneurship & Records-Johnston Professor of Free Enterprise 조교수이다. 기업가 정신과 경영에 관해 글을 발표해 왔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깨닫지 못하는 것: 규제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방식』, 『생산의 문제: 새 기업이론』을 저술한 바 있다.


Haeng-Bum Kim is professor of public choice at Pusan National University, Korea.

To read this article at MisesWire Korea, click here.

When commenting, please post a concise, civil, and informative comment. Full comment policy here

‘맨큐경제학’의 맨큐는 연준과 ... 노동가치설을 사랑한다

[Translated by Jinyoung Bae (배진영)]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경제학 교과서로 대성공을 거둔 맨큐(N. Gregory Mankiw)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연방준비(Federal Reserve, 역주: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간단히 ‘Fed, 연준’이라 함)를 사랑한다. 다른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마음속으로 연준을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맨큐는 자신의 연준에 대한 진한 사랑을 왜 이처럼 밝혔을까? 연준이 미국 경제에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맨큐의 아래와 같은 대답 속에는 이처럼 아주 중요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약 20,000명의 미국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경제를 감시하고, 통화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기 위해 경제 분석을 하며, 금융시스템을 조율한다. 누구도 민간은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대단한 월급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하고 고집스럽게 그리고 어떤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들이 맡은 소임을 잘 수행한다."

금융위기를 심화시킨 “자책(unforced error)”을 인정함에도, 그 실수조차 “중앙은행에 대한 [맨큐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에 대해서 “완벽함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점수를 매긴다면, 맨큐는 연준에 “최고 등급”을 준다. (역주: 맨큐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연준 성공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에서 찾고 있다. 첫째, 연준의 목표는 나라에 보다 안전하고 보다 유연하며 보다 안정적인 화폐시스템과 금융시스템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내가 “목표”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라. 맨큐는 “대체로 (역주: 목표) 성취에 성공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실제 결과를 성취했는지의 여부보다 과시적인 목표를 추구하는데 최대한 노력을 했는지가 맨큐가 연준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두 번째 성공 요인에서 맨큐가 연준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분명해진다.

"연준 성공의 두 번째 요인은 연준에 자신의 삶을 바치고자 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연준은 매년 새로운 연구조원들을 최고의 대학교로부터 채용하고 있으며 새로운 직원의 경제학자들을 최고의 경제학박사로부터 뽑고 있다. 수년간에 걸쳐 나는 연준에 들어 온 많은 훌륭한 학생들을 알게 되었다. 경제정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근무처는 없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하는 당신의 공공기관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 리카르도(David Ricardo)의 낡은 노동가치설에 호소할 것인가?


글쓴이) Joseph T. Salerno

죠세프 살레르노는 Pace University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미제스연구소의 선임학자이고 Quarterly Journal of Austrian Economics의 편집위원이다.


Jinyoung Bae is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To read this article at MisesWire Korea, click here.

When commenting, please post a concise, civil, and informative comment. Full comment policy here

노트르담 화재와 우리가 잃은 것

04/16/2019Jeff Deist

[Translated by Jinyoung Bae (배진영 역)]

노트르담(Notre Dame) 사원의 끔직한 화재는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문화자본”이 한 순간에 파괴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12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붕과 첨탑의 오크나무 목재는 영원히 사라졌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 일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흔히 말해지듯이, 프랑스는 서구의 심장이고,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며, 노트르담은 파리의 심장이다. 이처럼 상징적인 교회가 불길에 휩싸인 광경은 그 자체로서 서구의 쇠퇴를 보여주는 표징이 아닌지 불안하게 한다.

여기에서의 “문화자본”은 금융자산이나 생산요소로서의 자본이라는 경제적 정의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자본을 “세세하게 서로 얽혀있는 복잡한 자본재의 구조”로 정의했다. 이질적인 생산재로서의 자본이라는 라스바드의 정의와 같은 오스트리안의 폭넓은 관점조차 한 사회의 모든 부(富)를 포착해낼 수 없다. 자본은 궁극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개별 단위들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있는 가톨릭 교인들에게 노트르담의 가치는 측정될 수 없다. 그래서 순수한 경제학 용어로 그것의 손상 또는 파괴의 비용을 계량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엄청난 손실이라는 사실은 다 안다. 그 아름다운 노트르담의 지붕과 첨탑에 담겨있는 수백 년에 걸친 부(富)는 이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블로거 Bionic Mosquito1는 문명화된(civilizational) 부(富)는 시간을 거치면서 중첩되어 가기 때문에 부는 물질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적이고 심지어 문명적이기까지 함을 일깨워 준다.

... 부(富)는 단지 대차대조표 상에 나타나 있는 것만이 아니다. 문화, 축적된 지혜와 지식, 시간의 압축이라는 관점에서 부를 바라보아야 한다.

축적과 시간이 핵심이다. 건강한 사회는 부를 쌓고 이를 보존한다. 즉, 건강한 사회는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창출하려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한 풀리(pulley, 밧줄과 도르래로 된 장치)와 발판을 사용하면서 200년 넘게 노트르담을 지은 사람들은 그들 작품의 최종적인 결과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 어떤 교황도, 어떤 건축가도, 어떤 금융가도, 어떤 석공도, 어떤 예술가도, 어떤 노동자도, 또는 어떤 프랑스 군주도 이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 세대들에게 오래 지속되는 그 무엇을, 돈으로는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좋은 그 무엇을 지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보다 훨씬 넘어서서 오래 가는 부를 건설했다.

건강한 사회라면 그 어떤 사회도 이런 일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넘어서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내재화 되어 있으며, 가장 야심찬 인간은 언제나 영원한 삶의 기념물이나 양식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즐기지 못할 미래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특히 수명이 짧고 힘든 삶을 살았던 우리 고대 선조들에게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양물(滋養物)을 생산해야만 하는 대신 오래 지속되는 형태의 자양물로서, 음식, 물, 의복, 거처를 얼마나 많이 원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이 특성이야말로 아마 어떤 다른 것보다도 문명의 특징이다. 우리는 이를 여러 가지 형태로 지칭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를 단지 다음과 같은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자본을 창출한다고. 그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보다 적게 소비한다. 이러한 자본축적이 투자와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상향나선(upward spiral) 형태의 효과를 내면서, 미래를 더욱 밝고 풍요롭게 만든다. 자본축적은 인류가 생계의 비참함을 극복하게 해주었고,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디지털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기술적인 노하우(know-how), 예술성, 장인정신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부의 형태이며 그리고 지금까지 분명히 그러해왔다. 그런데 아래 글[2]은 노트르담이 정말로 전과 아주 같은 방식으로 다시 지을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건축가는 기술적으로 아주 섬세하게 다시 짓기 위해 대성당에 관한 충분히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만, 장인정신은 꼭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성당을 구성하는 돌은 기계를 사용하여 깎을 수 있지만 오늘날의 석공들이 손으로 12세기의 석공들처럼 깎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머레이(역주: Stephan Murray, 컬럼비아 대학교 예술 역사가)는 Ars Technica(역주: https://arstechnica.com)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세기와 20세기 고딕 건물들은 항상 조금은 죽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돌이 석공의 손과(역주: 석공의 손이 빚어낸 것과) 동일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2

문명은 경제학 그 자체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이지만, 그것은 경제학을 필요로 한다.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민족들이 경제적 사고를 거부하는 교리에 계속 따를 경우, 그 문명은 멸망할 것이고 분명히 멸망한다“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래서 노트르담 화재의 그 슬픈 광경을 떠올릴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정치학과 경제학이 미래 세대를 위해 부(富)를 쌓는데 용기를 주는지 아니면 용기를 잃게 하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서구 국가들의 유산을 물질적인 복지로만 쳐다볼지라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분명히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다. 재정 및 금융 정책의 수요견인 열광자들과 더불어, 단기(短期)의 정치적 사고는 노트르담 지붕을 태워버린 화마와 똑같이 우리의 미래를 집어삼킬 수 있다.


글쓴이) Jeff Deist

제프 다이스트는 미제스 연구소의 회장이다. 그는 전에 하원 의원 론 폴(Ron Paul)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그리고 사모(私募) 투자 펀드 고객들의 변호사로서 일했다.


Jingyoung Bae is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옮긴이) 배진영(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To read this article at MisesWire Korea, click here.

When commenting, please post a concise, civil, and informative comment. Full comment policy here

좋은 통계, 나쁜 통계

04/12/2019Gary Galles

[Translated by Yisok Kim (김이석 역)]

어떤 이가 공공정책을 왜곡해 당신에게 엉터리로 제시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는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누가 그런 시도에 저항하도록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

누군가 특정 공공정책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려한다는 가설은 확실히 믿을만하다. (미국의) 두 주요 정당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 같고, 당내에도 여러 노선들이 있으며, 법과 규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이해관계자들이 우글거린다. 거기에다 언론은 파당적 스캔들과 논쟁거리를 찾기 위해 이런 것들을 마구 휘저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정책에 대한 왜곡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사실,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 대다수 집단들은 아니더라도 일부 집단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키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들이 쓰는 기술의 범위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에서부터 완전히 대놓고 거짓말하기까지 상당히 넓을 것이다.

세상에는 거의 완전한 거짓말에 가까운 일상화된 정치적 트릭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미네소타 입법부가 최근 〈전국대중투표제〉(National Popular Vote)의 제정 과정에서 몰래 집어넣기 시도를 했듯이, 종이 눈사태처럼 무수한 일괄 법안들 속에 바람직한 변화들이 (역주: 실현되지 못한 채) 파묻혀버릴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다뤄야할 문제지만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딴 사람에게 돌리는 애매한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킬 수도 있다. 그런 법안이 실무적으로는 집행 기관과 법원에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역주: 아무런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속임수는 내가 이 글에서 관심을 두는 게 아니다.

나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 위장의 뒤쪽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사물을 왜곡하는 방식이다. 나의 공공​​정책 수업을 듣는 학생에게 경고했듯이 일반적인 원칙은 당신의 가장 취약한 분야에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그런 취약점 가운데 하나가 전형적으로 수학, 특히 통계다. 그래서 거짓말(lies)과 사악한 거짓말(damned lies)과 함께 수학과 통계학이 불명예를 뒤집어쓴다.1 그래서 허프(Darrell Huff)의 《통계를 동원한 거짓말》(How to Lie with Statistics)에 실린 ‘엉터리 통계를 악용하는 속임수들’은 출판된 지 65년이 지난 그 책을 계속 판매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널리 퍼진 무지(無知)는 통계학 자체보다 더 깊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시된 데이터가 실제로 무엇을 측정하는지, 어떤 가정들 아래 측정되고 또 어떤 한계점들이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 결과 통계가 부주의하고 무책임하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고용률과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2 두 지표의 이름들은 두 지표의 동시 상승이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지어져 있지만, 사람들이 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통계들이 믿을 만한 경제지표가 될 수 있다.

토마스 소웰(Thomas Sowell)[1]은 가장 최근의 저서 《차별과 격차》(Discrimination and Disparities)에서 이 문제를 "분석의 기반인 숫자들이 측정하려는 것을 실제로 측정하는지 아니면 측정한다고 주장될 뿐인지, 이런 간단하고 근본적인 의문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허위 진술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보다 면밀한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조사를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이런 기초적인 일을 해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대비하여 들 수 있는 가치 있는 “보험”을 제공한다. 흔히 제공되지 않는 이런 분야에서 보험 제공의 수고를 다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노고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받을 만하다. 나는 특히 내게 도움이 된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토마스 소웰은 수십 년 동안 다작의 저술을 통해 명확한 설명을 다수 제공해준 저자다. 예를 들어, 그의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구별이었다. 즉, (구성원들이 변화하지만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는[역자삽입]) 안정된 집단으로 해석되는 특정 집단(예컨대 “부유층” 또는 “빈곤층”)의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것과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분류들에서 벗어나) 다른 집단으로 이동하는 실제 사람들이 겪는 매우 다른 경험들을 구별할 필요였다. 이런 구별은 집단에 기초한 분석들이 내린 결론을 뒤집어엎는다.3

차별과 격차》는 그의 초기 저술들로부터 그가 다루던 주제를 다룬다. 그가 다룬 것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카드(Card)와 크루거(Krueger)의 최저 임금 조사에 대한 그의 논의다. 카드와 크루거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이 증가한다는 (경제학의) 결론을 뒤집은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소웰은 그들의 결론을 재검토했다. 그들의 연구는 최저임금 인상 전후의 고용 변화를 알아보려고 동일한 고용주를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생존자들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가능하다”는 데 있다. 사업의 중단으로 사라진 일자리들은 설문조사에 포함될 수 없다. 그래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생존자들이 고용을 줄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조사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많은 일자리가 여전히 사라졌을 수 있다.

상황을 더 확실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그는 러시안 룰렛을 예로 든다. 러시안 룰렛을 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러시안 룰렛 시행 전후의 상황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무도 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의 다음과 같은 신랄한 조롱도 인용한다. 1940년과 1946년 미국의 퇴역군인들에 그런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마도 그 조사는 “전쟁 중 사망한 병사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것이다!

이런 통계적인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많은 글을 쓴 또 한 명의 감시자는 마크 페리(Mark J. Perry)[2] 다. 그는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여러 번 잘못을 지적하는 매우 유용한 “붉은 깃발들”을 들어서 경고해왔다. 그의 지적이 주는 하루-최고의 즐거움을 내가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좋은 사례가 “동일임금일”(Equal Pay Day) 주장에 대한 그의 “문제점 콕 집어내기”다.[3] 동일임금일 주장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연간 (중간) 소득의 차이를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하는”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 때문이다.

그는 동일임금일 주장에 사용된 데이터가 “근로 시간, 결혼 여부, 자녀 수, 교육, 직업, 지속적인 중단 없는 직업 경험 년수, 근로 조건, 작업장 안전, 직장 유연성, 직장의 가족 친화력, 직업 안정성 및 통학 시간” 등의 차이를 조정하지 않은 채 사용됐다고 지적한다. 앞에서 열거한 요인들은 남성들에게 평균적으로 더 많이 지불케 한다.

앤드류 빅스(Andrew Biggs)[4]도 통계적 책임에 관한 한, 특히 퇴직연금과 퇴직플랜과 관련된 분야에서, 매우 깐깐한 또 한 명이다. 예를 들어, 최근 GAO4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55세 이상 미국 가구의 48%가 "저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는 〈포브스〉에 기고한 글에서[5] 전통적인 확정급여형 연금이 고려될 경우, 72%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저축 플랜을 가지고 있고, 또 가족 중 한 사람만이 퇴직 플랜을 가진 경우를 포함하면 결혼가구 중 83%가 퇴직 플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보고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임을 보여주었다. 확정급여형 연금을 포함하고, 결혼 가구들 가운데 가구원 한 명이 퇴직 플랜을 가진 경우를 고려하는 등 두 가지 변화를 주기만 해도 결론이 완전히 뒤바뀐다! 그는 여타 편견들도 지적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나로 하여금 측정(measurement) 이슈를 종전에 비해 훨씬 잘 이해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정책 이슈들에 대한 나의 분석을 훼손시켰을 오류들을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졌다. 독자들도 내가 이들로부터 받은 것과 유사한 “개인지도”에 관심을 갖게 될지 모른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나에게 유용했다. 그리고 특히 이런 유형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풀이 아직 ​​너무나 얕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계속 배워나가면서 미래에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내가 주로 심각한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은 통계적 적용과 제시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無知)뿐만 아니라 정책적 결론에 이르면서 자주 벌어지는 데이터의 오용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다.


글쓴이) Gary Galles

개리 갤러스는 페퍼다인대학교(Pepperdine University) 경제학 교수이다. The Apostle of Peace: The Radical Mind of Leonard Read 등의 저술이 있다.


Yisok Kim is chief editorial writer for Asiatoday, Seoul, Korea 김이석(아시아투데이 논설심의실장)

To read this article at MisesWire Korea, click here.

  • 1. [역주] “거짓말, 사악한 거짓말, 통계”(Lies, Damned Lied, and Statistics)는 숫자의 설득력, 특히 약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의 사용을 설명하는 문구이다. (위키피디어 인용)
  • 2. [역주] 고용률이란 15세 이상 생산가능인구 중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실업률은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일할 능력이 없거나 일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구직포기자, 학생 등을 뺀 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고용률과 실업률의 합은 1이 아니다. 고용률과 실업률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고용률=경제활동참가율×(1-실업률). 실업률이 높아지더라도 경제활동참가율이 충분히 높아지면 고용률도 동시에 높아질 수 있다.
  • [1]. https://tsowell.com/
  • 3. [역주] 예를 들어 소웰에 따르면 “모든 미국인 가운데 절반은 그의 일생 가운데 일정 시점에서 그들의 소득이 ”소득상위 10%“에 든다. 23년간을 두고 보면, 약 4,600명 정도가 1년 정도 소득상위 400인 안에 든다.” 집단간 이동을 제외한 분석은 마치 400명만이 그런 소득상위에 속할 수 있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그런 착시 속 내린 결론도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 [2]. https://www.aei.org/author/mark-j-perry/
  • [3]. https://www.aei.org/publication/for-equal-pay-day-evidence-of-employers-paying-women-20-less-than-men-for-the-same-work-is-as-elusiv
  • [4]. https://www.aei.org/author/andrewbiggs/
  • 4. [역주] GAO는 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의 머리글자를 딴 미국의 국회소속 기관인데 과거에는 Government Accounting Office로 불렸고 회계검사원 혹은 회계감사원 번역됐지만 회계적 책임을 넘어서는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우리나라의 감사원 혹은 국회예산처에 상응하는 기구로 보면 된다. 
  • [5]. https://www.forbes.com/sites/andrewbiggs/2019/03/27/no-half-of-older-americans-arent-without-retirement-savings/?
When commenting, please post a concise, civil, and informative comment. Full comment policy here

인공지능 AI가 무슨 잘못인가? 국가가 문제이지

04/09/2018Per Bylund

[Translated by Jinyoung Bae]

그래서 저는 “당신은 이 컴퓨터를 신뢰합니까?(Do you trust this computer?)”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의 선과 악을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선과 악을 다루고 있지만, 분명히 그 초점은 AI를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것이 초래할지 모르는 ‘TEOTWAWK(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세상의 종말)’에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TEOTWAWK AI의 예가 ‘자율 무기(autonomous weapon)’와 ‘가짜 뉴스’라는 점입니다. 가짜 뉴스는 AI가 어떻게 소수의 지지를 받는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할 길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이 모두를 이해하고 심지어 두려워하지만, 이 예들 속에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AI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를 장악하려는 국가의 군대와 그 집단만이 ‘살인 로봇(killer robots)’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살인 로봇은 이들 집단에/을 의해/위해 개발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와 ‘부당한 영향’ 문제 또한 국가 위의 권력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무기나 어떤 가짜 뉴스도 AI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상하게 꼬아 그것을 AI의 문제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영화가 AI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규제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논리입니다. 국가가 문제의 공통 분모인데 그것이 동시에 해결자라니요? 그 대신 국가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믿게 합니다: 구글(Google)이 우리의 웹 검색을 추적하고 페이스북(Facebook)이 우리의 친구와 신념을 안다는 것이 문제다(“자동화 무기가 그러하기 때문에?”)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추한 것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어떤 기업도 삶과 죽음에 대해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실 기업은 가장 냉혹한 규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산활동을 합니다. 그곳은 바로 시장입니다.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합니다. 돈은 오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통해 획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원하고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오펜하이머(Oppenheimer)의 ‘경제적’ 수단) 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 그것을 빼앗음으로써(‘정치적’ 수단) 입니다. 기업은 전자에 따라 작동합니다. 그것은 기업이 소비자의 자비에 기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국가는 후자에 따라 작동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가짜 정보’로 그들을 속이는 등 그런 능력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영화가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놓치고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제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논리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면, 희망 어린 생각에 불과하며, 거기에 있는 것이 명백히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해결책은 단순히 해결책이 아닙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데이터를 선별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AI를 이용하는 방법을 국가가 규제한다면, 이것은 또한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 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에도 그리고 이들이 소비자로부터 자발적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수집한 데이터에도 적용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후자는 자율 무기에서 사용될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 영화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심각히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치적 수단과 오페하이머의 경제적 수단 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최근에 있었던 두 가지 신용 위기를 생각해보십시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l)’의 붕괴로 인해 페이스북 주가가 급락했으며 이것이 주주들에게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히게 되자, 페이스북은 즉시 사업 변경을 했습니다. 그 가치는 그 웹 사이트와 그것의 앱을 사용하여 계속 컨텐츠를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것에 근거합니다. #페이스북삭제(#DeleteFacebook) 해시태그 운동이 주주들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이것을 영화 스노우든(Snowden)에 의해 드러났던 것과 비교해 봅시다. 국가가 모든 사람들을 염탐하지 않나요? 기업들은 데이터를 부분적으로 수집합니다. 그 기업들은 이를 위해 요구되는 사항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그것에 관해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할 책임을 강요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누수가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밀한 국가”의 감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마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약간의 새로운 경로가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일어난 문제들을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 더 문제가 많은가요? 소비자의 신용(정말로 변덕스럽지만)에 종속되는 ‘경제적’ 수단인가요, 아니면 통찰력과 감시에 구애 받지 않고 비밀스러운 데다 우리가 원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 비용을 우리에게 떠넘기면서 전혀 책임도 지지 않는 ‘정치적’ 수단인가요?

‘정치적’ 수단이 어떻게 자율 무기와 동시에 국가 권력을 유지하고/요구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이 모두를 목표로 삼는지를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수단 중 그 어떤 것도 유토피아적인 완벽한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히 내장된 통제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완전한 비밀 속에 행해지며 우리가 그 비용을 (비자발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정치적’ 수단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기대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학교에서 국가는 “우리 편”이라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감시하고 자율 무기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사실, 자율 무기의 “개발 중단”이라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고는 쉽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정말로 믿겠습니까?

사실은 이렇습니다. 단순한 거짓말과 가장됨에는 내리막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하여 사람들이 어떤 기업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 그 기업은 한 순간에 쓸려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 기업의 가치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논리는 현실에서 쉽게 작동되지 않으며, 그래서 그 영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지능(human intelligence)의 국가라면, 우리의 손에 들어 있는 데이터로부터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려는 우리의 능력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계가 실제의 패턴을 인식하여 이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영화 제작자들이 다음과 같이 경제학의 기초도 모른다고 해도 놀라지않을 것입니다: 자동화는 보다 적은 비용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동화를 거대한 문제로 지적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아! 안돼. 오늘 월요일 아침 이에 관해 생각해보세요. 

Jinyoung Bae is a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Mises.kr

When commenting, please post a concise, civil, and informative comment. Full comment policy here
Shield icon power-market-v2